‘순하기만 하던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부모의 말에 순응적이던 아이가 자기 주관이 생기면서 호불호가 정확해지고 이에 반비례하듯 고집이 늘어간다.
기어 다니는 게 엊그제 같던 아이가 어느새 기호가 생길 만큼 성장했다니 반가울 따름이지만 아이에게 찾아온 ‘싫어’병은 ‘노 땡큐’다.
어느 날 불쑥 아이 입에서 ‘싫어’가 튀어나오는 순간, ‘싫어’병의 전조 증상으로 여기며 엄마들은 훈육 계엄령을 선포하며 비상사태에 돌입한다. 아이가 ‘싫어’라는 단어를 알게 된 순간부터 엄청난 갈등이 예고되기 때문이다.
‘싫어’하고 말하는 빈도와 강도가 차츰 증가함에 따라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으면 온몸으로 싫음을 나타내는 아이. 부모의 예측 가능한 범위를 지나 돌발적인 행동은 여지없이 부모를 난처하게 한다.
부모는 당장 아이의 행동에 대한 문제를 문제 삼기보다 이후, 아동의 버릇에 영향을 끼칠까 봐 염려한다. 혹시 적절하지 못한 부모의 대처로 아동이 버릇이 없을까 봐 혹은 주눅이 들게 하는 것은 아닐지 말이다.
훈육의 적정선을 찾지 못한 채, 훈육이란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만리길도 마다하지 않는다. 나름의 최선의 방법으로 온라인에 검색해보기도 하고, 부모교육 프로그램 강좌를 신청해서 수강하기도 하고 각종 전문가들이 집필한 서적을 찾아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해할 리 만무하다. 서점에 들어서면 눈앞에 보이는 무수한 육아서. 200p분량이 넘는 육아서를 통독하기란 엄마에게도 많은 인내를 요한다. 어디 서적뿐이겠는가. 강의를 들으러 이동하면 걸리는 시간이며 강의 시간까지 포함하면 최소 두세 시간은 걸린다. 게다가 저마다 교육관에 따라 다 다르게 말하니 오히려 듣고 나면 혼란스러워지기만 할 뿐이다.
훈육이 별거 있겠느냐지만 별거인 훈육을 위한 요점정리는 없을까? 행간의 의미와 문맥을 이해하기 위해 개념의 정의가 중요하듯, 훈육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훈육’이라는 용어에 대한 적절한 정의가 필요하다.
훈육이란 정의를 부모가 아동을 통제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아동의 행동을 주도하는 것을 가리켜 훈육이라 한다. 부모가 일방적으로 감정과 상황에 따라 아동을 통제하고 제한하는 것을 일컫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동의 행동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부모님이 일관되고 예측 가능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아동을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일관되고 예측 가능하게 아동을 다룰 수 있는지 살펴보자.
과유불급, 통제와 제한은 꼭 필요할 때만
일상생활에서 부모가 의식하지 못한 채, 아동과 생활하는 전범위적으로 너무 많은 통제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다. 부모의 너무 많은 통제와 제한은 아동을 무기력하게 할 뿐 아니라 좌절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난발하는 부모의 제한은 훈육의 일관성마저 떨어뜨리기 때문에 부모는 아이가 꼭 지켜야 하는 것과 아닌 것,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명확히 함으로써 통제와 제한을 꼭 필요할 때만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훈육은 비난이 아니다
훈육은 아동을 비난해도 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따라서 부모고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아이에게 화낼 이유도 없다. 그러나 훈육을 하다 보면 부모의 감정이 앞서기 마련. 앞선 감정은 아동을 함부로 다루게 하지만 일관성 있는 부모의 태도만큼 중요한 것이 아동을 존중하고 정중한 태도다. 이런 존중하는 태도는 아이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데 있지 않다. 비난의 말이 섞여 있지 않고 사실에 따른 잘못을 지적할 때 아동은 부모의 말을 수용하고 따를 수 있는 근거가 생긴다.
아이에게 휘둘리지 말자, 설명은 짧게
부모-자녀 간, 굳어진 수직적인 관계 보다 수평적인 관계를 지향하는 시대를 살아내는 부모는 아동을 납득시키려 노력한다. 왜 하면 안 되는지, 왜 그래야만 하는지 떼를 쓰는 아동을 향해 존경받을만한 인내심으로 계속 달래고 어른다. 그러나 부모가 통제할 때는 아이한테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는 선택권을 주는 권유의 의미가 아니다. 따라서 부모는 태도를 단호하게 해야 한다. 따라서 아이에게 질질 끌려다니며 계속 설명하기보다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이후에 왜 그러면 안 되는지 설명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오유정 키즈맘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