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어린이 프로그램이 우뚝 서 있던 시절, ‘모여라 딩동댕’ 전신부터 ‘어린이 영어프로그램 뿡뿡이’까지 어린이 콘텐츠를 기획·담당하며 HOT 부럽지 않은 인기를 누렸던 정현숙 EBS 책임프로듀서(CP).
평생직업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오늘날, 80년대 후반에 입사해 약 30여 년을 어린이 콘텐츠에 매진하면 한 길만 걸어온 정CP는 ‘교육방송’의 자신의 ‘소명’이라 말한다. 오랜 시간 교육방송에 몸담고 있다 보니 그녀의 이름 뒤에 적지 않은 직책과 수식어가 거쳐 갔다. 정CP가 ABU어린이 의장을 맡은 지도 햇수로 어느덧 14년째다. 해가 거듭되고 겹겹이 쌓이는 근속연수만큼이나 초심과 열정이 해졌을 법도 한데 어떤 면으로 보나 만년 베테랑인 그녀는 생기로웠다.
더욱이 힘주어 말하는 나긋한 목소리와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는 정CP가 자신의 일을 얼마나 사랑하고 열정적 태도로 대하는지 그녀의 말을 대신한다.
그녀는 답한다. 오히려 세계 각국의 여러 나라와 어린이 콘텐츠를 교류하면서 교육방송의 역할과 미디어가 불러일으키는 파급력에 대한 고심은 더욱 확장되고 깊어졌다고 말이다. 이런 고민은 그녀가 책임을 맡아 기획한 프로그램 사이사이마다 고스란히 배어 있다.
정CP는 재작년까지 나라별로 어린이 단편을 만들어오다 지난해 12월, 6개국이 국제공동제작한 다큐프라임 ‘미래人교육’을 공개하며 ‘같은 부모로서 공감할 수 있었다는 부모’의 호평을 받았다.
생각이 건강한 부모가 건강한 내면을 갖춘 자녀를 양육할 수 있다는 그녀의 믿음에 따라 ‘경쟁 위주의 교육’ 혹은 현시대의 정답처럼 여겨지는 ‘자녀 교육’이 미래에도 효용 가치가 있을지에 대한 물음 대신 ‘가정에서 배우는 교육’의 중요성에 느낌표를 던진다. 프로그램은 시대적 변화와 논리만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자녀 교육, 즉 미래를 위한 자녀 교육에 대해 부모가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전환점이었다.
‘미래人교육’에서는 부모에게 마음을 헤아리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또한 자녀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서 그 흔한 방법도 제시하지 않는다. 단지 부모와 자녀가 겪는 갈등과 갈등 관계에서 빚어내는 이야기를 통해 그저 부모가 생각할 기회만 던져줄 뿐이다.
스펙의 가짓수가 늘어나다 못해 이제는 인성도 하나의 스펙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전망을 뒤로한 채, 부모 자녀 간 가정에서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짚으며 급격하게 돌아가는 사회 속에서 휩쓸리지 않기 위한 구심점을 가정에 둔 정CP.
그간 어린이 콘텐츠를 맡아오던 그녀가 ‘미래人교육’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회 집단 ‘가족’에 주목한 까닭은 무엇일까.
제목이 '미래人교육'이다
‘4차 산업혁명’의 물결로 영원할 거라 믿었던 가치와 시스템은 무너지고 인공지능마저 경쟁 상대가 되는 시대의 흐름 앞에 미래 자녀교육은 부모에게 커다란 숙제로 떠올랐다. 아직은 부모의 손에서 키워지는 작은 아이들이 사회를 이끌 큰 사람이 되기까지 불과 10여 년, 20여 년 밖에 안 남았다. 미래를 살아야 하는 이 친구들이 지금 무슨 교육을 받아야 그때 건강하게 준비될 수 있을까 궁금했다. 이 친구들의 준비라는 부분에서 미래인 교육이라는 콘셉트를 잡고 프로그램명을 지었다.
'미래의 교육'의 대안을 가정에서 찾았다
4차산업 혁명으로 기술이 발달하고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할 거라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인간은 분명 AI와 다르다. 따라서 인간이 가진 순수성과 인간다움은 미래에 더 강조될 것이다. 이런 준비의 시작은 교육기관이 아닌 가정에서, 부모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은 논의될 만한 충분히 의의가 있다.
가정에서의 '교육'이란 무엇인가
평생교육 시대를 살아야 하는 미래의 아이들에게 ‘교육’이란 배우는 즐거움과 효용 가치가 있는 배움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육’을 떠올리면 흔히 어디에 갇혀서 습득되는 지식쯤으로 여기지만 가정에서의 교육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엄마랑 아빠가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상황에 따라 커뮤니케이션하는 기술을 배우고 상황 대처 능력을 기른다. 원인과 결과에 대해 생각할 줄 알고 무조건적으로 화내기보다 참았다 얘기할 줄 아는 자제력을 갖추며 스스로의 맵을 그려나간다. 부모는 아이에게 지식을 나눠서가 아닌 지혜를 나누는 사람으로서의 시사점을 가진다.
'부모는 아이에게 지식을 나눠서가 아닌 지혜를 나누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참 좋다. 6개국 7가정이 참여한 프로그램인의 규모만큼이나 커다란 함의를 갖는다
프로그램이 굉장한 거대 담론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 거대 담론은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출발했다. 부모와 자녀가 어떻게 눈을 맞추고 눈길을 보내는지에 따라 아이의 생각과 행동이 바뀐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부모의 마음이 여유가 없으면 아이한테 눈길 줄 여력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 이야기가 한 편의 드라마 같았다. '같은 부모로서 공감할 수 있었다', '좌절보다는 희망을 노래한 부분이 좋았다' 등의 공감적인 호평도 이어졌다. 공감을 이끌어 낸 부분이 특히나 성공적이다
이번 콘텐츠는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다. 앞서 말했듯, 부모가 어떤 것을 보고 어떻게 느끼는지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잘잘못을 따지며 훈수 두고 싶지는 않았다. 단지, 자기 동기 유발이 돼서 한 번쯤 부모가 생각해볼 기회를 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부분이 공감적인 부분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남의 집 이야기가 아닌 그 모습 속에서 투영된 자신을 바라보며 내 감정에 매몰되고 충실했을 때 보지 못 했던 자녀의 표정이 보인다면 그런 부분에서 의미 있는 성공이다.
베테랑인 정CP도 콘텐츠를 제작하면서 많은 고민이 있었다고 들었다
어느 부모나 자기 자식이 잘 됐으면 하는 공통적인 바람과 욕망이 있다.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
만 주고 싶고, 할 수만 있다면 레드카펫을 깔아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방법의 차이인 부분을 혹여나 ‘맞다’,’ 틀리다’ 재단해서 말하는 게 될까 봐 조심스러웠다. 더욱이 부모의 방법에 대해서 조롱의 대상 혹은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원하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해 신경을 많이 썼고 그렇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하려 애썼다.
아이에 대한 이해의 시작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하나?
교육심리학을 전공하고 청소년지도 담당하는 선생님이기도 한 독일엄마에게 자신이 자유방임형인지 타이거맘인지 물었다. 자기는 솔직히 자유방임형 엄마인 것 같지만 솔직히 에너지 레벨에 따라서 다르지 않겠냐고 하더라. 맞는 말이다. 부모가 일 끝나고 와서 너무 피곤한데 아이와 말을 주고받는다는 게 쉽지 않다. 편안한 부모가 아이를 잘 케어할 수 있고 덜 싸울 수 있다. 결국 그날그날의 에너지 레벨에 따라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녀에게 내어줄 공간을 만드는 연습을 해야 하는 것 같다.
미래인에게 요구되는 자질과 그런 자질을 키워주기 위한 가족, 가족을 통해 어떻게 행복한 미래 인재 요람이 될 수 있는 고민한 다큐프라임 ‘미래人교육'에서 뜻밖에 마주한 것은 미래를 준비하는 '전략'이 아닌 원론적인 공통된 부모의 '사랑'이다.
급속하게 변하는 사회 속, 넘실 거리는 파도 위에 서 있는 것 같이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의 진짜 경쟁력은 변함없는 부모의 사랑으로 견고해져 가는 '내면의 힘'에 있다.
꽃길만 걷게 해주고 싶은 부모지만 꽃길이든 흙길이든 함께해줄 부모. 가장 기본적인 사회 집단 ‘가족’에 정CP가 집중했던 이유는 아니었을까.
오유정 키즈맘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