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대학 시절 대안 생리대에 대한 강의를 듣게 되면서부터였다. '깨끗해요'라는 광고문구 속에 그간 생리는 불결한 것이라는 인식을 가졌던 것을 깨우치고 면 생리대를 쓰기 시작했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났지만, 여성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여전히 후지다. 불과 몇 달 전 공개해 큰 파문을 일으켰던 행정자치부의 가임기 여성 지도에 이어 이번에는 국책 연구기관이 내놓은 고스펙 여성의 하향결혼 유도전략까지 여성은 아직도 주체이지 못하고 도구이며 대상일 뿐이다.
다시 한번 페미니즘에 크게 주목하게 된 계기는 아이 엄마가 되면서부터다. 주변의 워킹맘과 경력단절 여성들의 현실을 피부로 접하게 되면서부터 내 안의 페미니즘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직도 수많은 여성이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고용차별을 당하고 있고 육아 대부분을 감당하면서도 생계를 위해 저임금 일자리로 내몰리고 있다. 그 많던 똑똑한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성차별적인 교육
페미니즘의 필요성은 비단 엄마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아이들의 교육에서도 절실하다. 여성혐오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 아주 은밀하게 심어진다. 소위 말하는 명작동화로 알려진 <헨젤과 그레텔> 속에서 아이들을 버리라고 꼬드긴 새엄마는 나쁜 사람이고 ‘어쩔 수 없이’ 자기 자식을 내다 버린 아빠는 착한 사람이다.
<백설 공주>에서도 남자인 왕은 딸 하나 못 지키는 허수아비일 뿐 새 왕비는 공주를 죽이려는 전형적인 ‘여자의 적은 여자’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 동화 속의 여자는 마녀, 계모, 추녀 혹은 예쁘지만 나약해서 왕자가 구해줘야만 하는 존재로 정형화돼 있다.
아이가 즐겨보는 뽀로로 동화책에서조차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면 요리를 하고 있고 엄마는 친구들과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고 이모는 백화점에서 가방 쇼핑 중이다. 반면 아빠는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고 삼촌은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다. 고루하게도 책 속의 의사는 남자고 간호사는 여자다.
아이들이 즐겨보는 만화에서조차 여자는 '꽃'과 같은 장식적인 존재로 한두 인물 정도만 나올 뿐이다. 어린이집에서조차 요리하는 엄마의 모습을 흉내낸다며 요리를 여자의 일로 한정짓고 있다. 아이는 자연스럽게 고정적인 성 관념을 가지기 시작한다.
남성 중심적인 사고를 하는 일부 엄마들
남성 중심적인 교육을 받고 자라난 일부 아들 엄마들 역시 자신도 모르게 그 길을 답습한다. 딸들은 예민해서 다루기 피곤한데 아들은 뒤끝이 없어서 좋다는 편견으로 시작해서 학교에서는 여자 선생님을 기피하는 현상까지 있다.
동성의 롤모델이 필요하다는 것이 주된 궤변인데 그렇다면 아빠들은 왜 좋은 롤모델이 될 수 없는가 의문을 가지게 된다. 또 여자애들은 '독해서' 우리 아들이 성적이 잘 나오지 않는다는 피해망상을 가지기 시작한다. 남녀공학에서 여자아이들과의 성적경쟁이 두려워 남고로 전학시키기도 한다. 실제로는 아들들이 살아가면서 남자로서 누리게 될 기득권이 훨씬 많은데도 말이다.
페미니즘, 여성우월주의가 아닌 양성평등
아직도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들으면 미간을 찌푸리며 과격하고 예민해서 상대하기 피곤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양성평등을 뜻하는 것이지 여성우월주의가 아니다. 나는 두 아들을 가진 엄마로서 이들을 페미니스트로 키우기로 했다. 페미니즘은 또한 여성뿐 아니라 사회의 모든 소수자들에 대한 평등을 뜻한다. 세계화와 다양화가 추구되는 21세기에서 어쩌면 가장 갖추어야할 덕목이다.
남자는 분홍을 좋아해, 페미니즘 교육의 시작
페미니즘 교육은 대단히 어렵거나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남자는 파랑, 여자는 분홍의 공식에서 벗어나 아이에게 좋아하는 색을 선택할 자유를 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큰 아이가 왼손잡이인데 이것을 오른손을 쓰도록 교정하는 대신 왼손용 젓가락를 찾아서 사 주었다.
아이와 놀아줄 때도 균형감각을 갖추려 노력하는 것이 좋다. 로보트를 제일 좋아하는 아이지만 주방놀이도 준비해 역할놀이를 함께 한다. 아이는 여자아이들과 섞여 서로의 손톱에 매니큐어도 칠해주고 화장을 해주다가도 터닝메카드를 변신시키며 논다.
아이와 대화와 스킨십을 많이 하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무뚝뚝하고 공감 능력이 없는 남성으로 키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는 이제 누군가가 "남자가 무슨 분홍색을 좋아해"라고 말을 하면 "남자도 어떤 색이든 좋아할 수 있어. 난 분홍색이 좋아"라고 대답한다.
페미니즘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아빠의 역할
이 교육방식에서는 아빠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아빠가 설거지할 때 의자를 딛고 올라가 함께 헹구는 것이 아이에게는 즐거운 설거지 놀이이다. 비록 계란후라이 밖에 못하는 아빠일지라도 자꾸 부엌일을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이에게는 최고의 페미니즘 교육이다.
또한, 아빠들 역시 엄마에게 함부로 말하거나 쉽게 '자고로 남자는 ~이래야 한다'든가 '어딜 여자가~한다'는 성차별적인 발언을 내뱉어서는 안 된다. 아빠의 말 한마디, 행동방식 하나가 아이에게는 동성의 롤모델로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나이들어서 '자식이 나를 외면하네', '가장은 외롭네' 하는 푸념을 하는 것보다 아이가 어릴 때부터 친밀하게 인간관계의 맥락을 이어가는 것이 현명하다. 요즘 아빠 육아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있어서 매우 다행이다.
필수가정교육영역: 혼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살림의 기술
가정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영역은 예의뿐 아니라 '살림의 기술' 역시 필수적이다. 빨랫감을 널 때도 키 작은 건조대를 구입해서 자신의 양말과 팬티 정도는 너는 빨래 놀이를 하고 있다. 자기 전 아빠와 함께 방에 어지러진 장난감들을 정리함에 주워 담는다.
아이의 연령이 높아짐에 따라 빨래 개기와 청소기 돌리기 등의 단계별 살림의 기술을 생활 속에서 전수할 생각이다. 이렇게 자란 아이는 나중에 어른이 되어도 '여자의 도움' 없이도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어른이 될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데도 이조차도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여자여서 살림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딸일 때부터 살림을 돕도록 교육받아왔고 누군가는 그들의 누나와 여동생이 차려준 밥상만 받아왔기 때문에 이루어진 결과이다.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행복한 미래
노년에 사별하는 배우자들의 경우 남아 있는 여성은 평균 5년 정도를 더 살다 가지만 남성의 경우 평균 6개월 정도 밖에 못 산다는 통계가 있다. 언제부터 우리나라 할아버지들이 이토록 로맨티시스트였단 말인가. 할머니들은 언제까지고 그들의 수발을 들어줄 수 없다.
다년간의 젠더사이드(우리나라의 경우, 주로 여아 낙태)를 통해 2037년까지 심각한 성비 불균형을 초래했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우리의 아들들과 결혼해줄 수 있는 여자의 절대적인 수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미래의 남자들은 여자 없이도 살아갈 자력을 갖추어야 한다.
또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결혼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더이상 '남의 집 귀한 딸'들을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 단순한 유전자의 보존 혹은 늙은 엄마 대신 수발을 들어줄 여자들이 아니라 서로 동등하게 대우하고 아껴줄 수 있는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제 페미니즘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심효진 육아칼럼니스트
이화여자대학교 졸업
(전)넥슨모바일 마케팅팀 근무
(전)EMSM 카피라이터
(현)M1 정진학원 교육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