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대로 라면 세부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선 베드에 누워 있고 옆에서는 뿅갹이가 신나게 모래 놀이를 하고 있어야 할 지금, 나는 식탁 한쪽 구석에 앉아 칼럼을 쓰고 있다.
둘째가 생긴 지 드디어 15주차가 됐고 나름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둘째가 태어나면 한동안 가족여행은 꿈도 못 꿀 거란 생각에 임신 기간에 어디라도 가자며 성화를 부렸다. 그 외에도 명분은 다양했다. 남편은 신혼여행 이후에 한 번도 해외여행을 못 간 상태였고 남편과 나, 뿅갹이 셋이서 여행을 간 적이 없던 터라 이번 기회에 어디든 꼭 가자며 다들 고무돼 있었다.
우리는 바다를 좋아하는 뿅갹이와 함께 따뜻한 나라에 가서 온종일 수영을 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셋만의 온전한 휴식을 누리고 올 심산이었다.
남편과 나는 뿅갹이를 재우고 여행 관련 사이트를 알아보다가 날짜가 임박한 여행 상품이 저렴하게 나온 것을 발견했다. 소위 말하는 '땡처리' 상품에 우리의 눈은 커졌다. 에어텔이라 전 일정이 자유인 것도 마음에 쏙 들었기에 서둘러 예약 신청을 했다. 우리의 마음은 이미 세부의 바닷가에서 스노클링을 즐기며 물고기들과 노닐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여행사에서 전화가 왔다.
"마감 임박 상품이라 1시간 내로 전액 입금하셔야 예약이 확정됩니다"
마음이 벌렁벌렁했다.
"여보, 입금할까? 어떡할까? 우리 드디어 함께 가는 거야?"
입금하고 나니 우리의 마음은 한층 더 들떴다. 막상 며칠 후에 떠나려고 보니 작아져버린 뿅갹이의 래시가드도 새로 사야겠고 남편이 쓸 챙이 넓은 모자도 하나 사야했다. 둘째라 그런지 벌써 제법 배가 나와서 임부용 수영복도 필요했다. 주말에 백화점에 들러 이것저것 사고 비상식량으로 햇반도 넉넉히 사놓았다. 며칠 집을 비우려니 미리 일 처리를 해야 할 것도 꽤 있었다. 은행에 들러서 환전도 하며 분주한 며칠을 보냈다.
드디어 출발 전날, 어느 정도 준비를 마쳤고 이제 짐만 싸면 된다며 차 한 잔을 들고 소파에 앉아있었다.
그 때 불현듯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세부도 필리핀이고 동남아인데 지카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한 걸까?'
자세를 고쳐 앉아 부지런히 인터넷으로 검색을 시작했다. 불과 며칠 전 우리가 입금하고 기뻐하던 그 날, 필리핀을 다녀온 한국 관광객이 지카 바이러스 감염 확진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내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왜 하필 필리핀이었던 걸까. 그걸 왜 입금 직전에 한 번 더 확인해보지 않았던 걸까. 얼마 만의 가족여행인데, 게다가 출발 하루 전날 위약금까지 물고 이렇게 취소해야 하는 걸까. 머릿속에 갖가지 생각이 맴돌았다.
"여보, 위약금을 못 돌려받는 건 정말 안타깝지만 취소하는 게 맞는 것 같아. 정말 낮은 확률이라 해도 만약에 당신이 모기에 한 방 물리는 날이면 그 순간부터 지옥같이 느껴질 거야"
한껏 들떴다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내게 남편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울상을 지어봤지만 이내 머릿속에 한 장면이 그려졌다.
"…국내에서 최초로 지카 바이러스 양성판정을 받은 임신부가 발생했습니다. 감염자 심모 씨는 지난 달 필리핀 세부에 가족여행을 다녀온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뉴스에 헤드라인으로 장식되는 임신부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위약금을 생각하면 속이 쓰리지만 만에 하나 지카 바이러스에 감염돼 노심초사하며 초음파로 뱃속 아이의 커가는 모습을 살필 생각을 하니 지금 고집을 피울 때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길로 여행을 취소했고 남편은 나에게 조만간 안전한 곳으로 여행을 떠나자며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남편을 위한 여행이라며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내가 더 고무되어 있었다는 것을 남편도 알고 나도 알고 있었다. 취소 직전까지 망설이는 마음이 있었지만 막상 취소하고 나니 뜻밖에 담담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도 아니고 기회야 또 만들어서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위약금은…좋은 데 가서 비싼 거 먹고 쇼핑했다고 여기기로 했다.
결국, 우리 가족은 일상을 다시 살고 있다.
언젠가 가족 여행을 떠날 날을 꿈꾸면서.
심효진 육아칼럼니스트
이화여자대학교 졸업
(전)넥슨모바일 마케팅팀 근무
(전)EMSM 카피라이터
(현)더나은심리계발센터 교육팀장
(현)M1 정진학원 교육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