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부터 인상 깊게 봤던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30대 싱글인 캐리는 친구의 베이비샤워에 참석해 수많은 또래 동네 여자들의 육아 모습을 보고 강한 이질감을 느낀다. 그때 당시 내 인생에서 결혼이란 건 일어나지 않을 일이거나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연히 '캐리'의 입장에서 받아들였고 나 역시 친구들이 애를 낳게 되면 저렇게 흰 돌무더기 속의 유일한 검은 돌처럼 될 날이 올 것으로 생각했다. 다만 어서 결혼해서 애를 낳으라는 친구들의 조언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굳센 의지를 다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시간이 지나고 20대 후반이 되면서 우리는 각자 다양한 선택을 했다. 준비 끝에 원하던 직장에 들어간 친구도 있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전문대학원에 진학해 다시 학생의 길을 택한 친구도 있었으며 박사과정을 위해 유학길에 오른 친구도 있었다. 또한 해외로 취업해 비행기에 몸을 실은 친구도 있었다.
그 와중에서 가장 의외였던 것이 결혼을 선택한 '나'였다고 친구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당연히 혼자, 그것도 즐겁게 살면서 싱글들의 희망이 되어줄 거라고 기대했는데 모두의 기대를 배신하고 먼저 결혼을 해버렸다는 친구들의 볼멘 소리를 나는 적잖이 들어야 했다.
게다가 결혼하자마자 바로 임신해버려서 나는 20대에 출산까지 '클리어'해버린 사람이 돼버렸다. 이때부터 친구들과의 틈이 생겼다. 내가 보기엔 커리어를 쌓고 있는 멋진 친구들이지만 그들에게 나는 결혼과 출산이라는 미션을 이미 달성해버린 안정감의 정점에 선 팔자 좋은 여자가 되고 만 것이다. 그들 눈에 비친 나는 결혼해서 남편에게 사랑받고 살고 있으며 아이는 너무 잘 자라주고, 혹시나 지루하지 않게 가끔 글을 쓰고 취미 생활을 즐기는 동화 속의 주인공쯤으로 여겨지고 있다. 내가 입덧 때문에 요리는 못 하고 편의점에서 사 온 백종원 도시락으로 1일 1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대부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사실 육아에는 기쁜 순간보다는 깊은 빡침의 순간이 더 많다.
개인적으로 결혼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반드시 거쳐야 할 인생의 필수 코스가 아니라 언제든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미혼'이라는 말 자체에 결혼을 이루지 못한, 언젠가는 결혼을 해야 할 사람이라는 뜻이 내포돼있기 때문에 나는 그 단어를 쓰는 것조차 좋아하지 않는다. '비혼자'도 행복할 수 있어야 하고 그들의 선택도 존중받아야 한다. 먼저 결혼했다는 이유로 싱글인 친구들 앞에서 우월감을 느낀다든지 어서 너도 좋은 사람 만나라는 등 재수 없는 동정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여자가 결혼했을 때 감당해야 할 의무와 희생이 너무 많기 때문에 결혼을 기피하는 여자들의 입장이 십분 이해가 간다. 사실 그런 걸 생각하다 보면 내가 비교적 이른 나이에 결혼할 수 있었던 것은 결혼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한마디로 철이 없었기에 결혼이 가능했다. 많이 배우고 똘똘하고 야무지기 그지없는 친구들조차 왜 결혼 앞에서는 이렇게 작고 약해져야 하는 건지 안타깝다. 행복의 기준이란 상대적인 것이어서 나 역시 하이힐을 신고 여성미 폴폴 풍기는 친구들의 자태가 부럽다.
싱글의 관점에서 유부녀인 친구와의 우정을 지속하는 건 역시나 희생을 요하는 일이다. 어느 날 갑자기 애 엄마가 돼버린 친구의 관심사는 온통 육아와 시댁에 치중해있고 일생일대의 중요한 선택이 될지 모르는 남자 문제는 그녀에게 시답잖은 고민거리일 뿐이다. 그러니 더 이상의 공감대 형성이 어렵다.
게다가 싱글녀와 유부녀의 만남이 성사되려면 일방적으로 홀몸인 싱글 친구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경우가 많다. 번화가의 핫한 음식점에서 만나는 것이 당연한 싱글들과는 달리 유부녀는 늘 자기 동네 혹은 자기 집으로 친구들을 불러들이려고 안달이다. 애를 데리고 나오는 것까진 그런가보다 싶어도 온통 애한테 정신이 팔려 있어서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조차 알 수 없고 이야기의 맥이 수시로 끊긴다. 그 앞에서 싱글의 고민을 늘어놓기란 시작조차 어렵다. 사실 남의 애는 그리 예쁘지도 않은데 연이어 단톡방에 애의 일거수일투족을 올려대며 귀엽다는 반응을 강요하는 듯한 친구의 태도 역시 불편하다. 우정이 지속되려면 전보다 더 많은 인내심이 필요하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꺼내자면 그렇게 유부녀들과의 거리감을 가지던 친구들도 주인공 4명 중의 한 명인 '미란다'가 싱글맘이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육아 세계에 동참하게 된다. 모두가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미란다의 고충을 이해하기 낯설어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어색해하는 것은 미란다 본인이다. 여유롭기만 하던 싱글 친구들의 브런치 모임에 어쩔 수 없이 애를 데리고 나와야 하는 미란다의 모습에 사만다는 결국 화를 내고 만다. 하지만 애를 돌보느라 머리 한 번 다듬지 못하는 미란다를 위해 본인의 미용실 예약 자리를 내어준다. 그사이 우는 애를 달래기 위해 본인의 바이브레이터를 동원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긴 하지만 그건 사만다 나름의 육아 비상 상황에 적응해가는 모습이었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역시 싱글이다. 나만큼 육아 친화적이지 않은 친구였는데 그런 만큼 우리 집에 놀러 왔을 때 뿅갹이를 능숙하게 안아 본 적조차 없다. 하지만 친구는 내가 싱글일 때와 마찬가지로 나를 대했고 나의 상황에 맞춰서 뿅갹이도 함께 노는 것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우리는 집에서 맛있는 것을 만들어 먹고 때로는 번화가의 맛집을 찾아 뿅갹이까지 함께 출동하고는 했다. 그 과정에서 이 친구가 뿅갹이와 친해져 가는 과정을 보는 것이 매우 재미있다. 함께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뿅갹이는 '이모'를 좋아하기 시작했고 이제 말이 서로 통하기 시작하자 둘은 친구처럼 어울리기 시작했다. 주로 애를 달고 놀아야 하는 내 상황을 이해해주고 나와 놀기 위해 우리 집까지 먼 길을 놀러 오는 것을 꺼리지 않는 친구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뿅갹이를 재우고 서로의 손에 네일케어를 해주며 여전히 싱글이었을 때처럼 친구의 소개팅남에 대해 함께 분석하고 고민한다.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에 놓인다. 어느 날 갑자기 미란다가 싱글맘이 되어버렸던 것처럼 샬롯이 난임에 시달리다 이혼녀가 되기도 하며 싱글맘이던 미란다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게 되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각자의 가정이 생기고 삶의 상황이 달라지면서 그들의 브런치 모임은 전보다 뜸해졌고, 함께 클럽에 가서 몸을 흔들며 스트레스를 풀던 주말 밤은 사라졌지만 그렇게 서로의 달라진 상황을 이해하면서 그들의 인간적인 유대는 더욱 깊어졌다.
우리의 삶도 그와 같아서 나와 달라진 친구의 처지를 비교하고 비관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친구의 본질 그 자체를 보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우정은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변해버린 상황에서도 그에 맞춰 이해하고 함께하려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같은 학교, 같은 동네 처럼 비슷한 환경 덕분에 친구가 될 수 있었지만 삶의 모습은 언제나 변하기 마련이고 배려의 방식도 늘 달라져야 한다. 그 바탕에는 서로에 대한 진심이 있어서 싱글과 유부녀가 모두 친구로 지낼 수 있었으면 한다.
심효진 육아칼럼니스트
이화여자대학교 졸업
(전)넥슨모바일 마케팅팀 근무
(전)EMSM 카피라이터
(현)더나은심리계발센터 교육팀장
(현)M1 정진학원 교육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