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임신기간의 어느 날 아침 전화벨이 울렸다.
평소에도 '이런 구식 전화벨을 아직도 쓰냐'는 평을 듣곤하는 내 벨소리다.
무심하게 내려다보니 '엄마'였다.
“네.”
“그래 자고 있었니?”
볼멘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니요오. 오늘은 일찍 일어났어요. 아우, 엄마는.”
늘 늦잠자는게 맞는 주제에 간만에 일찍 일어났다고 짜증을 내고 말았다.
내내 놀다가 마음잡고 책을 펴면 공부 좀 하라고 하는 전 세계 엄마들의 공통된 타이밍은 자식이 나이가 들어서도 변하지 않는가보다.
'전세계엄마연합' 같은 곳에서 다 같이 교육받지 않고서는 그런 쩌는 타이밍은 나올 수 없을 것만 같다.
엄마는 33세에 나를 낳았다.
당시 분위기를 추측컨데 상당한 노산이었을 것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넌 지금 20대에 결혼과 출산을 하게 되어서 그렇게까지 느끼는 감정이 덜하겠지만 엄마는 그때 나이가 서른이 되어가는데 딱히 이루어놓은 건 없고 내 옆에 있는 남자도 내가 온전히 믿고 기댈만하지는 못한 것 같고 참 마음이 복잡했었어”라고 하셨다.
순간 가슴이 먹먹해져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엄마는 평생을 7남매의 맏딸로 또 반대하는 결혼을 한 죄인으로 환영은 커녕 땡전 한 푼 받지 못하고 본인이 벌어서 먹고 살았던 사람이다.
엄마는 한 학기 공부하고 다시 한 학기 휴학해서 과외비 벌어서 다음 학기 등록금을 모아 다니고 하느라 대학을 7년 만에 졸업할 수 있었다고 했다.
“듣고 있니?”
“네, 말씀하세요.”
“그래도 지금 돌이켜보면 그 때의 시기가 있었고 치열하게 살았던 기억이 있기에 그게 다 밑거름이 되어서 지금은 참 행복하단다.”
29살, 유달리도 추웠을 엄마의 겨울.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 쓸쓸한 뒷모습을 힘껏 안아줘야겠다.
늦잠을 늘어지게도 자고도 또 잘 수 있었던 임신기간이 지나고 지옥 같은 신생아 키우기가 시작된 지 일주일, 나는 친정에서 조리 중이었다.
생애 첫 손주, 뿅갹이를 안아 든 엄마의 손이 너무도 투박했다.
할머니가 된 게 싫은 눈치는 아니지만 내가 ‘엄마’가 된 게 어색한 만큼 엄마가 ‘할머니’가 된 것도 익숙하게만 받아들여지진 않을 것이다.
멍한 눈을 하고 탱글탱글하기만 하던 엄마 손에 언제 저렇게 주름이 살짝 내려앉았는지 내가 그동안 너무 무심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고개를 돌리니 뿅갹이가 예쁘다며 연신 인사를 건네는 아빠의 왼쪽 귓가에 검버섯이 하나 피었다.
이렇게 새 생명이 태어남과 함께 한 세대가 물러가는구나.
자연의 순리임에도 나의 부모도 어김없이 그 순리를 따라야 함이 야속해 마음 한 켠이 저릿하다.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줘도 계속 보채기만 하는 뿅갹이에게 지쳐 남편에게 자식은 왜 낳는 걸까 메신저로 얘기한 적이 있다. 몸조리 기간 동안 떨어져있던 남편은 나의 반응에 놀라 바로 전화를 걸었을 뿐 그에 대한 답은 주지 않았었다. 그 역시 부모가 된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멍하니 엄마를 보다 말을 건넸다.
“엄마, 아빠, 뿅갹이가 커서 장가갈 때까지 계셨다 증손주도 보고 가세요.”
“얘, 얘, 그 때쯤엔 우리가 아흔이 다 되어 있을 텐데. 증손주 보겠니?”
“에이, 그래도 이렇게 이뻐해주시는데 손주 덕 좀 보셔야지.”
“그 땐 다 늙었는데 무슨 덕이니.”
웃으며 그 말을 하는 엄마는 언제 저렇게 할머니가 될 마음의 준비를 했을까.
나는 아직 ‘엄마’가 될 만큼 마음이 단단해지지 않았는데.
나의 부모가 저 아이에겐 할머니, 할아버지고 저들도 언젠간 이 세상을 떠날 거란 사실이 갑자기 다가와 가슴이 먹먹해졌다.
자식을 왜 낳는가.
아직 답을 얻지 못했다. 그 답을 알기엔 부모로서 고작 한 달 반의 시간은 너무 짧았나보다. 나의 부모가 언젠가 이 세상에 없게 된다 하더라도 갓 태어난 펄떡거리는 힘찬 저 생명이 이어나간다는 사실 그 자체로 위안이 되는 걸까 조금 상상해보았다.
친정엄마에게 내가 지어준 그녀의 별명은 아인슈타인, (요리계의) 피카소 등이다. 언제나 바쁜 그녀는 아빠가 수여하는 ‘노벨외출상’의 수상자이기도 하다. 그런 별명이 붙게 된 데에는 나름의 연유가 있다.
평소 집중하는 일이 한 가지 생기면 다른 주변의 것은 쳐다도보지 않는 그녀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간다. 전화벨이 울리자 마음이 급한 나머지 방문을 냅다 열어젖히며 ‘여보세요’를 외치던 사람이다. 그런 그녀의 성미는 요리할 때 유독 천재성을 발휘한다. 엄마의 된장찌개에는 볶음멸치와 호두가 떠다니기도 하고 열무김치에 콩가루와 콜라를 버무리기도 한다.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에는 언제나 무엇이 올라와있을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이럴 때 산후조리사님이 내 먹거리를 챙겨주신다는게 그렇게 안심이 될 수가 없다. 늘 저녁까지 차려주고 퇴근하시기 때문에 나의 먹거리는 안전하다. 몸조리에 도움이 될까 싶어 해독주스를 만들어 먹었는데 함정은 양배추, 당근, 브로콜리의 기본재료 외에 자신이 원하는 과일을 넣을 수 있다는 데에 있었다. 평소에는 늘 산후조리사님이 출근하자마자 만들어주셨는데 딸기+바나나, 오렌지+키위 등의 조합으로 해달라고 했었다. 어느 날 느닷없이 파프리카를 갈아 넣으셨을 때 빼고는 늘 맛있게 먹었다. 문제는 주말이었다. 산후조리사님도 쉬시고 친정엄마가 해독주스를 만들어주시겠다고 했는데 어쩐지 생양파를 넣고 싶어 하셨다.
“마음 같아서는 마늘도 좀 넣고 싶어.”
역시 천재는 괜히 천재라 불리는 것이 아니다. 일반인이 상상해낼 수 있는 틀을 완전히 부숴 버려야 한다. 마늘과 양파라니 내가 웅녀도 아니고 나의 해독주스는 내가 지키기로 했다.
친정집 내 방 한 켠에 걸린 빛바랜 배냇저고리에서는 왠지 젖비린내가 날 것만 같다. 이십여 년 전에 내가 입었을 낡디 낡은 배냇저고리를 엄마는 여태껏 간직해왔다. 행여나 먼지가 앉을까 엄마는 멋없게도 랩을 씌워놓았다.
“이게 네가 태어나서 처음 입었던 배냇저고리야. 그땐 이 옷도 너무 커서 완전 코트였지뭐야.”
내 방에 들어올 적마다 엄마는 몇 번이고 그 말을 반복하곤 했었다
그 시절의 엄마는 반대하는 결혼을 한 탓에 자신의 임신 소식을 다른 가족들에게도 채 알리지 못하고 다인실 병동에서 아빠와 섬처럼 둘이었다. 30시간의 진통 끝에 응급 제왕절개를 해가며 어렵게 만난 딸이었지만 그 첫인상은 못난 땅콩 같았다.
‘내가 저 조그만 핏덩이를 낳자고 그 고생을 해가며 내 인생을 모두 바꿔가며 모험을 한걸까.’
그 마음도 모르고 싱글벙글 입이 귀에 걸려 신생사실에 선 남편은 “신생아실에서 제~~일 예쁜 아가 찾아봐. 그게 우리 아가야. 난 딱 보이는데”라며 속 모르는 소리만 하고 있었다.
유난히 숱이 많아 새까만 머리와 움푹 팬 보조개를 한 그 아이는 그 날 부터 그녀의 딸이 되었다. 안아본 아이의 무게는 주어진 인생에 비해 너무도 가벼웠다.
“너를 처음 안아들었어. 너는 우는데 내 주머니엔 삼백 원 밖에 없더라. 그 때도 너희 아빤 한 달도 안 된 아이를 안고 베란다에 나가 ‘갹갹아, 별이 밝지?’ 하며 너를 돌보곤 했단다.”
지금 내 품에 안긴 뿅갹이의 배냇저고리는 곱게 줄무늬가 들어간 네이비색이다. 가슴팍엔 귀여운 강아지 모양도 달려있다. 배냇저고리라고는 내 방에 걸린 것 밖에 본 적이 없는 터라 다 그렇게 행주같이 생긴 것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 때도 누군가는 브랜드 배냇저고리를 입었을는지 모르지만 세월이 참 좋긴 하다.
회복실에서 처음 본 뿅갹이는 마냥 신기하고 사랑스러웠다. 양가부모님의 응원과 관심 속에서 태어난 이 아이에겐 그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다. 나의 엄마가 누리지 못했던 가질 수 없었던 마음의 평안을 내가 느꼈다.
이 생명을 통해 모녀의 역사는 진화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의 어린 시절과 그 때의 부모의 마음을 많이 돌이켜보게 된다. 이제 나의 부모는 많이 늙었고 굳은 사고를 가진 완벽한 기성세대가 되었다. 아직 젊은 축에 속하는 나로서는 이제 부모의 단점도 많이 보이고 답답하지만 바뀌지 않는 부분이 보일 때마다 숨통이 조여 오는 듯 답답하다. 어찌 보면 나의 인생의 롤모델이었던 완벽해야할 나의 부모가 실은 단점도 많은 한 어른임을 인정하는 데에서 나의 ‘부모 되기’는 시작되었다. 작게는 새로 이사한 집 안의 커튼을 고르는 것부터 크게는 정치적인 이슈까지 나의 부모는 나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물론 나를 너무 사랑하고 나에게 최고의 것을 주기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온 내 부모이지만 유년기에 있었던 나의 심리적 부재에 대해서 볼 멘 소리를 한들 돌아오는 대답은 “그 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어. 당장 먹고 살기 바빴잖니.”라는 네가 이해하라는 말 뿐이다.
나의 부모도 하나의 인간이기에 완벽하게 이상적인 교육을 하지는 못했다. 내가 부모가 되어 육아서적을 읽어보고 직접 육아를 해보니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던 것인지 더 잘 다가온다. 나는 맞벌이 부모 밑에서 크느라 여러 사람의 손에 맡겨졌었고 그들이 해대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아직 깊게 자리 잡지 못한 심지는 유난히도 휘청였다. 당장 생존의 문제에 허덕이는 부모도 더 이상 어떻게 할 수는 없었겠지만 나는 충분한 심리적인 위로를 받지 못하고 어깨에 가득 문제집을 짊어 진 어린이였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어찌 보면 핏덩이를 예의와 도덕과 사회성을 갖춘 구성원으로 키워내면서 나의 유년기를 돌아보고 그 공백을 스스로 메꿔가면서 생의 의미를 다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가장 좋은 공부는 남을 가르치는 것이란 말처럼 말이다.
심효진 <육아 칼럼리스트>
남편과 아들,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고 있다. 살림과 꽃꽂이를 좋아하고 기록을 할 때 정신이 가지런해진다고 믿는 5년차 주부. 글쓰는게 제일 꾸준하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해 틈틈이 소설과 에세이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