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 아이들은 언제 쑥쑥 커서 하나에서 열까지 내가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때가 올까’ 하며 늘 시간이 빨리 흐르기를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유난히 잠투정이 심했던 첫째 아이를 재우려고, 아기띠를 안고 동네를 돌아다니는 나를 볼 때마다 자녀를 훌쩍 다 키워 놓으신 왕 고참 할머님들은 지나가며 한마디씩 내게 던지셨다.
"힘들지? 하지만. 지금이 가장 좋을 때야. 아무렴, 지금이 가장 행복할 때지. 조금만 더 커봐. 품안에 자식인 지금을 그리워하게 될 걸. 나도 저 때가 그립다 그리워...."라고.
처음 그런 말을 들었을 땐 어린 아이 키우느라 피곤해 보이는 초보엄마를 다들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등학생을 키우는 윗집 아주머니도 엘리베이터에서 유치원가방을 맨 아이 손을 잡은 나를 보면서, “아이구, 부러워요. 저렇게 엄마한테 쫑알쫑알 얘기를 걸어주는 자식이 있다는 거 말이에요. 요즘 우리 애들은 집에 오면 자기 방문 닫고 들어가기 바쁘다니깐. 어릴 때는 내가 한 시라도 떨어지면 그렇게 울고불고 난리치더니 말이지. 아이들이 크면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것 같이 허하다고 쓸쓸해져요. 지금을 즐겨요.”
문득, 몇 년 전 TV 광고가 떠올랐다. ‘대한민국에서 엄마로 산다는 것’이라는 타이틀로 나왔던 피로회복제 광고 말이다. 간난 아기 키우는 엄마는 유치원 보내는 아이를 보며 “부럽다 언제커서 뛰어 노나?” 하고, 교복입고 다니는 자식과 함께 다니는 엄마를 쳐다보며 “부럽다 언제커서 학교 보내냐?”하고, 결혼시킨 딸과 함께 가는 중년을 보며 “부럽다. 시집보내면 다 키운거지”하고 말하는 광고 말이다.
요즘 나는 깨닫는다.
나도 머지않아 바로 '지금'을 그리워할 때가 올 거라는 걸.
하루 종일 '엄마'를 불러대고, 내 눈을 바라봐주고, 엄마의 품안에서 빙빙 돌며 매달리는 지금 이 순간들을 엄청나게 그리워하게 될 그 날.
그래서, 난 육아가 힘들 때면 30년 후의 나를 떠올린다. 지나가는 귀여운 어린 아이들을 보며, '지금'을 그리워하고 있을 중년 이후의 나의 모습을 말이다.
이름하여, '미리 그리워하기 연습'.
그 어떤 주문보다도 효과적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말이 “엄마~ 이리 좀 와봐~~” 였다. 또, 무슨 놀이를 같이 하자고, 날 부르는 걸까? 또, 무슨 말도 요구사항을 풀어놓으려고 날 부르는 걸까?
아침에 눈을 뜨면 제발, 아이가 나를 부르지 않고 혼자서 조용히 잘 놀아주었으면 하는 이기적인 바램들로 가득했던 시간들.
‘미리 그리워하기 연습’을 시작한 후부터 갑자기, 커다란 무게로 느껴지던 육아 현실이 아름답게 채색되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와의 일상 대화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유치원에 다녀온 둘째가 나를 보며 물었다.
"엄마는 커서 뭐가 될꺼야?"
너무나 해맑고, 진지하게 묻는다.
처음엔 "응. 엄마는 이제 어른이라 다 컸어. 엄마는 이제 더 이상 안 크는 거야" 라고 대답해주었다. 막상 그렇게 대답하고 돌아서는데 왈칵 서글퍼졌다.
'난 정말 다 큰 걸까?'
어른이 된다고, 엄마가 되었다고, 꿈을 꿀 수 없는 건 아닌데, 난 언제부터인가 현실의 울타리안에서 적당히 타협하며 나이 들어가는 아줌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동화책을 읽어 주는데 딸아이가 또 물어본다.
"엄마는 커서 뭐가 될 거라고 했지?"
이번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해주었다.
"응. 엄마는 좀 더 커서 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재미있는 영화를 쓰는 시나리오 작가도 되고 싶고, 뮤지컬 배우도 해보고 싶고, 중창단에서 신나게 노래도 부르고 싶고, 에...또.... "
그러자, 딸아이는 심각하게 고민하더니 "내가 보기에 엄마는 동화책을 재미있게 읽어주니까. 이 다음에 크면 국어 선생님이 좋을 것 같아. 열심히 해봐" 이런다.
내가 더 클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삶이 좀 더 말랑해지는 느낌이다. 설령, 꿈으로 그칠지라도 말이다. 엄마는 아이를 키우면서 그 아이의 나이로 되돌아가서 다시 자란다는 말이 있다. 그래, 지금 내 나이는 일곱 살.
언젠가 내 품을 훨훨 날아가 버릴 사랑스런 나비를 그리워하는 연습을, 귀여운 애벌레 시절을 함께 했던 ‘지금’을 그리워하는 연습을 충분히 해두어야겠다.
‘미리 그리워하기’ 연습을 말이다.
이지원 <교육 칼럼리스트>